M실버타운 박지영 (가명, 82)

S실버타운 정혜영 여사님 집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약 2주일 정도 지난 후 M실버타운에 계시는 같은 여중 동창생인 박지영(가명) 여사님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는 모친과 동행하지 않고 저자 혼자 방문하였다.

20145M실버타운에 사시는 박지영 여사님과 토요일 오전 10시에 방문 약속을 잡았다. 일산에서 넉넉한 시간을 두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토요일 아침부터 상춘객의 발길로 경부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통에 11시가 다 되어 M실버타운에 도착했다.

M실버타운은 산자락 밑에 여러 동의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진입로 입구의 경비실에 바리게이트로 외부인 진입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입주민과의 약속이 되어있음을 확인한 경비원이 바리게이트를 올려 주었다.

차로 단지를 반 바퀴 정도 돌자 박 여사님이 거주하는 동이 보였고 지하에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공간이 꽤 넉넉했다. 지하주차장에서 입주세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이 역시 인터폰을 통해 입주민인 박 여사님과 통화를 해야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박 여사님 집 벨을 누르니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10시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11시에 도착한 셈이니 한 시간이나 기다리셨다고 했다. 예기치 않은 교통체증 때문에 늦기는 했지만, 80대 초반의 혼자 사시는 여성 어르신이 토요일 오전 크게 바쁘실 것 같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엄청난 불찰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무척 넓었다. 혼자 사시는데 이렇게 넓은 평수가 필요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여쭈어 보니 57평이라고 하셨다. 아파트와 구조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파트다. 베란다에 난초며 화분들이 햇살을 한껏 받고 있었고, S실버타운 정 여사님 거실에 걸려있는 것처럼 작고하신 부군을 포함해 가족사진 등이 걸려 있다. 큼지막한 부군의 독사진도 있었는데 군인정복 어깨 위에서 별 두 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박 여사님은 나이가 드셨지만 장군의 아내라고나 할까? 탄탄하고 강단 있어 보이셨다. 또한 어쩌면 저렇게 피부가 고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름살 하나 없는 하얀 피부에, 허리도 저자보다 더 꼿꼿해 보였다. S실버타운 상담팀의 J씨가 정 여사님에게 살갑게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 있어, “어머님 어쩌면 이렇게 피부가 고우세요. , 남자친구 있으셔도 되겠어요!” 저자의 한마디에 말없이 빙긋 웃으신다. 미모에 대한 칭찬은 여자를 기쁘게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여자는 여자다. 나는 모친을 단지 어머니라는 굴레 이외에 위로와 따듯함을 받고 싶어 하는 여자로 대해드린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M실버타운은 부군께서 작고하기 이전에 미리 노후대책으로 사놓으신 것이라고 한다. 이전에 방문한 S실버타운은 양로시설로 신고가 되어 있어 입주보증금을 내고 계약기간 동안 거주하게 되지만, M실버타운은 법적으로 복지주택이기 때문에 전세와 같은 입주보증금 제도 이외에 아예 등기이전을 통한 소유가 가능하다. 건물 생김새나 내부 구조, 70%가 넘는 전용률 등도 일반 아파트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노인복지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왜 이 아파트 단지를 실버타운이라고 부르는지 의아할 정도로 구분이 쉽지 않을 것이다.

부군이 계실 때에는 함께 서울에 있는 단독주택에 사셨는데, 부군께서 돌아가시고 박 여사님이 혼자 남게 되면 집 관리나 안전문제 등으로 단독주택에 계속 거주하기가 어려울 듯하여 M실버타운을 미리 구입하셨단다. 작고한 남편의 온기를 느끼며 외롭게 혼자 남겨질 수 있는 아내를 위해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하신 부군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박 여사님이 입주하기 전에는 동생분이 사셨다고 한다. 입주보증금을 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아예 구입하여 등기이전을 하면 소유권이 생기기 때문에 소유권자가 허락만 하면 누구든지 들어와 살 수 있으며, 인원에도 제한이 없다고 한다. 다만, 노인복지주택으로 신고가 되어 있기 때문에 법으로 60세 이상만 거주할 수 있다. 그런데 2008년 이전에 신고된 복지주택에 대해서는 나이 제한에 대한 규제가 풀렸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되는 노인복지주택은 60세 미만이라도 거주가 가능하다고 한다.

생활하시기 어떠시냐고 여쭈어 보자 살기 편해요. 분기별로 큰 이불빨래 같은 것 다 해주고, 매주 청소해주고, 단지 내 복지센터 가면 여러 가지 문화·여가·건강시설이 있어서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아주 좋아요.” 라고 하시며 아들뻘 되는 저자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붙여 주신다. 말씀에 힘과 절도가 있다. 소파에 앉아 거실을 다시 한 번 쭉 훑어보니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엿볼 수 없었다. 실버타운 단지 내에서 하시는 취미와 동호회 활동이 8개에 달하셨다. 노래나 서예 같은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골프와 탁구 동호회도 하신다는 말씀에 정말 활동적인 분이다 싶었다.

S실버타운에서 정 여사님이 박 여사님에 대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M실버타운에 사는 그 애는 낮에 전화하면 안 받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쏘다니면서 무얼 그리 하는지 무척 바뻐. 하여튼 하루 종일 무슨 강좌다 운동이다 하나봐. 나하곤 달라. 그러니 방문약속 잡으려면 저녁에 전화해. 그래야 받을 거야.”

가만히 주방을 보니 모든 조리 기구며 주방용품들이 다 있다. 식사에 대해 여쭈어 보니 아침은 단지 내 복지센터 가서 드시고 점심은 실버타운 동호회 사람들과 이곳저곳 식당에서 외식하고 저녁은 주로 집에서 드신다는 것이다. 아침을 복지센터에서 드시는 이유는 일어나자마자 아침 준비하기도 귀찮고, 그 시간에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 월~금요일까지 꽉 차있는 강좌, 취미교실, 골프, 탁구, 수영, 헬스, 게이트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시계를 보신다. 11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어디 약속이 있으신가 여쭈어 보았더니, 저자가 10시에 올 걸로 예상하고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저자에게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실버타운 복지팀장과 11시에 약속을 잡아 두셨다는 것이다. 갑자기 송구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80대 초반의 혼자 계신 할머니가 토요일 오전 무슨 큰 볼일이 있겠냐고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박 여사님은 저자를 위해 복지팀장과 11시에 미리 약속을 잡아 놓은 것 이외에도, 12시에 함께 복지센터에 있는 입주민 전용식당에서 식사까지 할 계획을 잡고 계셨다. 그런데 복지팀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에서 벌써 30분이나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금요일 저녁에 술이 과하면 토요일 늦게 눈비비고 일어나 하루 종일 빈둥대곤 하였는데, 박 여사님은 8개의 취미 및 동호회 활동을 하시며 아침 준비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 시간도 쪼개어 치밀하게 살고 계신 것이다. 누가 정말 노인인가? 저자일까? 아니면 박 여사님일까? 갑자기 더 부끄러워졌다.

깜짝 놀라 용서를 구하고 복지팀장이 기다리는 복지센터로 내려갔다. 7개의 아파트 동으로 구성된 M실버타운의 중앙에 6층짜리 복지센터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 입주민 전용식당과 각종 여가·건강·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박 여사님 사시는 아파트 1층 출입문을 나오면 옥외 엘리베이터가 있고 이것을 타고 내려가 다시 조금 더 걸어가니 복지센터가 보였다. 박 여사님은 앞장서서 걷고 저자가 뒤를 졸졸 따라가는 모습이 영 어색하다. 복지팀장 만나기 전에 1층부터 전 층에 걸쳐 박 여사님이 복지센터 투어를 시켜 주셨다.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도 굳이 한 개 층은 걸어서 올라가신다. 그 모습이 여든의 노인답지 않게 날렵하다. 가끔 중국 무협영화를 보면 깊은 내공을 가진 무림고수가 황제가 사는 궁궐의 지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뿐히 날아서 옮겨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박 여사님 계단 오르시는 것을 뒤에서 보면서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모든 시설을 둘러 본 후, 복지팀장과 상담을 했다. 상담하는 동안 박 여사님은 저자가 편하도록 멀찌감치 혼자 앉아서 묵묵히 기다려 주셨다. 1240분 상담이 끝나 박 여사님께 점심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니 웃으시면서 1시에 이미 동호회 회원들과 약속이 잡혀 있다고 하셨다. 다음엔 늦지 않게 와서 같이 점심이라도 하자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M실버타운은 초기에 내건 분양조건이 변경되면서 실버타운 측과 입주민들이 협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박 여사님께 이것을 여쭈어 보니 , 그거요. 난 뭐 보증금 낸 것도 아니고 내가 구입해서 소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관심 가진 입주민들 많아요. 그분들이 협상테이블에 들어가면, 난 그동안 골프치고 탁구동호회 회원들과 연습해요.” 라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말씀하셨다.

정말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걱정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일상사를 계속 걱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치밀하게 사는 것일까. 박 여사님은 이 해답을 알고 계신 듯했다.